마지막 여정으로 덕혜옹주결혼봉축비를 찾아갑니다.
진입로 모습
새벽 하산길에 보았던 바로 그 성문입니다...
이 성문안에 덕혜옹주의 결혼봉축비가 있는걸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金石城터로 되어있으나 현재 성은 존재하지않고 여기가 성터였다는걸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터에는 일본식정원을 가꾸어 입장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가장 고귀하게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비운의 여인....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를 일컫는 수식어는 다양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분입니다.
안내석과 결혼봉축비....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족이 아닌 일개 섬의 도주에게 결혼했던 여인
덕혜옹주는 일제 황후인 데이메이의 명령으로 36대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스무살되던 1931년에 걍제로
결혼하게 됩니다
동경에서 결혼식을 올린후 대마도로 왔는데 그때 대마두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 봉축비도 그런 차원에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란 이름을 들은적이 있지만 그 내용을 모르고 있다가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니 좀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다음은 위키백과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생애 초반
덕혜옹주는 경술국치(1910년) 뒤인 1912년 5월 경성부 덕수궁에서 이태왕이던 고종과 복녕당 양씨의 딸로 출생하였다.고종의 서녀로서 5살 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총독부는 처음에는 그를 왕공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1917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왕공족
으로 정식 인정되었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福寧堂阿只)"라고 불리다가 고종 사후인 1921년 5월 4일(양력)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서녀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고종은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일본 황적에 올리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장관 모두 덕혜는 사생아이므로 황적에 올릴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성대한 백일 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나 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일본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덕혜로 하여금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아버지(고종)와 오빠(영친왕, 순종, 의친왕)들과 함께 가족사진
일본 유학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유학을 간 그녀는 1925년 도쿄 가쿠슈인 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0년 모친 복녕당 양씨(귀인 양씨)의 사망
소식을 일본에서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복녕당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조발성 치매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졸업 후 일본 데이메이 황후의 명령으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쓰시마 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와
혼인하였다.
남편 소 다케유키와
쓰시마 이즈하라에서 (1931년)
불행한 결혼 생활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 정혜)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하였으나 소 다케유키는 그녀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였고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여러 번 방문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구 황족과 귀족들을 일반 평민으로 강등하였다.(신적강하)
신적강하로 그동안 지급되던 명목상의 황족 연금과 황실 자금 지원은 중단되었고 생계와 질병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1955년에는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얼마 뒤 마사에는 의문의 죽음을 맞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마사에의 의문의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고 질병과 우울증, 정신질환의 악화로 이어졌다.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에 의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귀국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덕혜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 26일 오후 12시 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이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을 받았다.
그러나 곧 언론과 사회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30년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
덕혜옹주의 행적을 존경심을 담아서 보도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뒤 덕혜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는 그녀를 여러 번 찾아왔으나 구 황실과 측근에 의해 면담이 거부당했고, 다케유키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여러 번 발걸음을 되돌렸다.
생애 후반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지 10여 년 후 덕혜옹주의 거처인 낙선재를 다시 찾았으나 황실 측근과국민 정서상 옹주를 만나는 것은 거부되었고 역시 발걸음을 되돌렸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 이방자도 사망하였다. 당시 덕혜옹주의 나이 향년 77세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묘는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있다.
사후
사후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는 소 다케유기 백작에 대한 비방과 그가 추한 괴물이라는 낭설까지
돌기도 했다.
소 다케유키의 후손들은 덕혜옹주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한국에 입국하였으나 당시의 국민 정서상 거절당하고 조용히
출국하였다
성터안 풍경입니다.
성문을 나섭니다
이제 여객터미널로 이동하는 중
가운데 건물이 이츠하라 여객선터미널
이 배는 이츠하라-하카다(후쿠오카)간을 운항하는 일본객선..
이제 막 출항합니다
이 배(오션 프라워)를 타고 부산으로....
부산에서 히타카츠까지 1시간10분
이츠하라레서 부산까지 2시간10분...
대마도로 올때는 높은파도로 10분이 더 걸렸고 부산으로 돌아올때는 양호한 기상으로 2시간만에 도착합니다
18:00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함으로서 1박2일간의 대마도여행이 끝납니다.
중앙동 뒷골목의 곰탕집에서 소주로 여행의 아쉬움을 달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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