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6월4일 아침 늦으막한 시간에 막내식구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집에서 가까운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를 둘러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 곳으로 이사온 지 일년이 넘었고 근처에 포은선생 묘소가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으나 언제 한번 가 지겠지 하고 미루다가 마침 막내의 제안에 흔쾌히 따라 나섭니다.
집을 나선지 20분도 채 되지않아 묘소 입구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포은 선생의 신도비가 보입니다.
신도비는 임금님이나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인물의 묘소 입구에 고인의 공적을 기록한 비라고 합니다.
가까이 다가 가서 잠시 읽어보지만 방대한 양에 다음의 한가한 시간으로 미루고 지나갑니다.
묘소 입구의 안내판을 둘러본 후 홍살문을 향하여 묘역으로 들어 섭니다.
멀리 제실이 보입니다.
제실에 이릅니다.
모현당(慕賢堂)과 영모재(永慕齋)...
그러나 문은 잠겨 있습니다.
제실을 지나면 선생의 묘역을 알리는 안내문과 백로가비와 단심가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백로가비
포은 선생의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단심가비(丹心歌碑)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답가였지만 포은의 마음을 확인한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심복 조영규로 하여금 척살케 합니다
선죽교에서 아내와 막내
그리고 나...
제실(祭室) 전경입니다.
묘역으로 올라 가다 만나는 연지(蓮池)
수련(水蓮)이 한창입니다.
이제 오른쪽 묘역으로 올라갑니다.
완만한 둔덕이 길고 넓게 펼쳐진 곳...
그러나 포은 선생의 묘가 아닙니다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의 묘입니다.
문외한이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명당으로 보입니다.
포은 정몽주선생 묘역에 이씨성을 가진 묘라니....
한 묘역에 각기 다른 두 성씨의 묘역이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래를 보니 주변 경관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이석형선생 묘에서 왼쪽으로 둔덕을 오르니 비로소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가 나타납니다
최근에 사초작업을 하였는지 봉분은 새로운 잔디가 아직 뿌리도 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개경의 선죽교에서 척살당한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의 시신은 저자거리에 버려져 누구라도 시신을 치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를 본 송악산의 스님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초묘를 만들었으며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 3대왕으로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2차레에 걸친 왕자의 난과 정적들의 제거로 왕권을 강화한 뒤 민심을 수습하고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를 복권시키고 영의정에 추증합니다. 또한 태종 6년인 1406년 개성에 있던 선생의 묘를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유골을 상여에 메고 고향으로 향하던 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을 지날때 상여행렬의 맨 앞에 세운 명정(銘旌)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 바람에 날아 가 이 곳에 떨어졌고 후손들이 지관에게 물어본 결과 이 곳이 명당중의 명당이라 하는지라 이를 하늘의 뜻이라 보고 이곳에 모시기로 하고 안장준비를 마쳤으나 날이 저물어 하관을 하지 못하고 하루를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르는 후손중에는 포은선생의 출가한 증손녀도 있었다고 하는데 명당중의 명당이란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잠든 틈에 아래에 있는 연못에서 밤새 양동이로 물을 길어 광중(壙中)에 부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선생을 모시려고 하니 광중에 물이 찼는지라 '명당인줄 알았느데 물이 나는구나'하고 탄식하고 옆 언덕을 보니 그 곳 역시 명당이라 하여 지금의 이 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출가외인이라는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 친정보다는 시가와 자손의 발복을 바랐던 증손녀의 배은(?)때문에 이 곳에 묻힌 셈입니다.
증손녀인 정씨부인은 이 후로 증조부묘소를 열과 성을 다하여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결국 포은선생의 후손인 설곡공의 허락을 받아 남편인 이석형선생의 묘를 명정이 떨어진 명당중의 명당으로 모시고 자신도 후에 같이 묻혔다고 합니다.
포은 정몽주선생과 증소녀사위인 저헌 이석형 선생이 갈은 묘역에 묻힌 사연입니다.
이후 연안(延安)이씨인 이석형선생의 후손들은 총 250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고 영의정을 포함한 정승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하여 조선의 최고 명문으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일(延日)정씨인 포은 정몽주선생의 후손들은 우의정 1명과 판서2명이 있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물론 포은 선생의 후손들은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은 가풍때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왼쪽 둔덕에는 포은 선생 후손인설곡공의 묘가 있습니다.
설곡공의 묘에서 바라 본 포은 선생의 묘...
묘역을 내려오며...
안내 팜프렛의 설명문...
정문 입구의 카페에서 한가하게 하늘을 봅니다.
초여름 절기이긴 하지만 오늘은 마치 한여름 날씨입니다.
푸른 나무위 하늘에는 하얀 솜털구름이 한가롭습니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친구와 동네 한바퀴 (0) | 2019.04.01 |
|---|---|
| 秋夕(추석)省墓(성묘)와 臨鏡臺(임경대) (0) | 2017.10.08 |
| 故鄕....., 故鄕의 江 (0) | 2017.05.07 |
| 叔父님의 他界 (0) | 2013.07.02 |
| 남포동의 연말풍경 (0) | 2012.12.18 |